국민이 법안을 만들고 직접 투표한다면…정치는 어떻게 달라질까
국회의원·정부만 법률안 제출 가능한 현행 구조…국민동의청원은 심사 요청에 그쳐
국민발안은 의제 독점 깨지만 다수결 오남용 위험…숙의·사전심사 장치 마련해야
국민이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모아 법안을 제안하고, 국회가 처리하지 않으면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제도가 도입된다면 정치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정당과 정부가 외면한 문제가 국가 의제로 올라가고, 선거 사이에도 국민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통로가 열린다. 국회의원이 어떤 법안을 발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국민이 직접 결정한다고 해서 더 나은 법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정책이 찬성과 반대라는 두 선택지로 축소될 수 있다. 충분한 정보와 토론 없이 감정적 여론이 투표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도 있다. 다수의 결정이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국민발안과 국민투표는 대의민주주의를 폐기하는 제도가 아니다. 시민에게 정책 의제를 제시할 권한을 주고, 국회가 이를 책임 있게 심의하도록 만드는 보완 장치에 가깝다. 제도의 성패는 국민에게 권한을 줄 것인지보다 그 권한이 숙의와 책임을 거쳐 행사되도록 설계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현행 헌법은 국회에 입법권을 맡겼다
대한민국 헌법은 입법권이 국회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는 주체도 국회의원과 정부로 한정한다. 국민은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지만 국회에 법률안을 직접 제출할 수는 없다. 헌법 제40조와 제52조가 정한 대의제 구조다.
국민투표 제도는 존재하지만 시민이 발동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다. 대통령은 외교·국방·통일과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헌법 개정안도 국회 의결을 거친 뒤 국민투표로 확정된다. 투표권자는 국민이지만 투표를 시작할 권한은 대통령이나 국회에 있다.
국민은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이용해 법률 제정이나 개정, 정책 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 공개된 청원이 정해진 기간 안에 일정 수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된다. 그러나 청원은 국회의 심사를 요청하는 제도다. 청원 내용이 법률안으로 자동 전환되거나 본회의 표결에 반드시 부쳐지는 것은 아니다.
청원이 위원회에 장기간 머물다가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될 수도 있다. 국회가 청원 내용을 일부 반영하거나 별도의 법률안을 발의할 수 있지만 이를 강제하는 장치는 약하다. 국민이 의제를 제시할 수는 있어도 결정 과정까지 주도할 수 없는 구조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안내에서도 청원을 국민의 권리구제와 입법 요구를 국회에 전달하는 절차로 설명한다.
국민발안과 국민투표는 서로 다른 제도다
국민발안은 일정 수 이상의 국민이 헌법이나 법률의 제정·개정안을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제도다. 국민투표는 발안된 안건이나 국회가 의결한 사안을 국민이 투표로 결정하는 절차다. 두 제도는 결합할 수도 있고 분리해 운영할 수도 있다.
가장 온건한 형태는 국민이 법률안을 제출하면 국회가 반드시 심사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국민은 의제를 제시하지만 법률안의 수정과 의결은 국회가 맡는다. 현행 국민동의청원보다 강한 권한을 주면서 대의제의 기본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국회가 국민발안 법률안을 일정 기간 안에 처리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국회가 부결하거나 기한 내 처리하지 않으면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식이다. 국회가 원안과 다른 대안을 마련하면 두 안을 함께 투표에 부칠 수도 있다.
가장 강한 형태는 시민이 완성된 법률안을 제출하고 국민투표에서 가결되면 국회 의결 없이 법률로 확정하는 방식이다. 국민이 입법권을 직접 행사한다는 의미가 가장 분명하다. 반면 조문 간 충돌과 위헌성, 예산 확보 문제를 투표 전에 모두 해소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
국회가 의결한 법률을 국민이 거부할 수 있는 국민거부제도 있다. 일정 수 이상의 국민이 법률 공포 전이나 시행 전 서명을 모으면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반대가 많으면 법률을 폐기하는 방식이다. 국민발안이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권한이라면 국민거부는 의회가 만든 법률을 통제하는 권한이다.
정치 의제를 정하는 힘이 분산된다
국민발안제가 도입되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의제 설정권이다. 현재 법률안의 내용과 처리 순서는 정당 지도부와 정부, 국회 상임위원회가 주로 결정한다. 국민발안은 이들이 외면하거나 미루는 문제를 공식 의제로 끌어올릴 수 있다.
산업재해 피해자나 희귀질환 환자, 플랫폼 노동자처럼 인구가 적거나 정치적 조직력이 약한 집단도 법률 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정당의 선거 전략에서 우선순위가 낮은 문제라도 충분한 시민 동의를 확보하면 국회 심사나 국민투표로 연결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가 정치권과 협상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생긴다.
선거에서 제시되지 않았던 문제에도 대응할 수 있다. 기술 변화와 감염병, 기후재난처럼 선거 이후 발생한 사안은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기 어렵다. 국민발안은 선거와 선거 사이의 정책 공백을 줄이고 변화한 민의를 제도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정당과 국회의원의 책임도 달라진다. 시민이 직접 법안을 제안할 수 있으면 국회는 반대하거나 미루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국민발안이 실제 투표까지 가지 않더라도 의회의 무응답과 무기한 계류를 줄이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시민 참여가 선거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다. 국민은 후보자와 정당을 선택하는 데서 나아가 구체적인 정책을 놓고 판단하게 된다. 정치적 효능감이 높아지고 정책 학습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정당 역시 시민이 제기한 의제를 흡수하기 위해 정책 경쟁을 강화하게 된다.
직접 결정이 항상 좋은 결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법률은 여러 이해관계와 제도를 연결한다. 한 조항을 바꾸면 세금과 예산, 행정조직, 다른 법률의 권리와 의무가 함께 달라질 수 있다. 국민투표의 찬반 문항만으로 이런 연쇄 효과를 충분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복지 확대안은 수혜 범위뿐 아니라 재원 조달 방식을 함께 결정해야 한다. 세금 인하안도 공공서비스 축소나 국가채무 증가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혜택은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비용 부담은 법안 밖으로 미루면 유권자는 불완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질문의 표현도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 같은 정책이라도 ‘규제 강화’와 ‘국민 안전 확보’ 가운데 어떤 표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발안 단체가 투표 문구를 독점하면 정책 결정이 문장 설계 경쟁으로 변할 수 있다.
거짓 정보와 정치광고의 영향도 크다. 짧은 영상과 자극적인 문구가 복잡한 법안 설명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자금력이 큰 기업과 노동단체, 종교단체, 정당이 서명 수집과 광고 시장을 지배할 가능성도 있다. 형식적으로는 시민발안이지만 실제로는 조직된 이해집단이 의제를 선점할 수 있다.
상반된 법안이 동시에 가결될 가능성도 있다. 국민이 복지 지출 확대와 세금 인하를 각각 찬성하면 정부는 충돌하는 명령을 동시에 이행해야 한다. 개별 안건의 찬반만 묻는 방식으로는 국가 재정과 정책 사이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기 어렵다.
다수결이 기본권을 침해할 위험도 있다
국민투표는 다수의 의사를 확인하는 제도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수결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 표현의 자유, 적법절차처럼 투표로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 함께 보장돼야 한다.
특정 인종이나 종교, 지역, 성별, 장애인에게 불리한 법안이 높은 지지를 얻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회적 불안이 커지면 범죄 예방이나 재정 절감을 이유로 소수자의 권리를 제한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을 수 있다. 해당 집단은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투표만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어렵다.
세대 간 이해 충돌도 발생할 수 있다. 현재 유권자가 미래 세대에 과도한 국가채무나 환경 부담을 넘기는 법안을 선택할 수 있다. 투표권이 없는 아동·청소년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의 이익은 국민투표에서 직접 대변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사안을 국민발안 대상으로 허용하기는 어렵다.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거나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안건은 사전에 걸러야 한다. 형사재판과 개인 처분, 공직자 인사처럼 개별 사건을 다수결로 결정해서도 안 된다.
조세와 예산을 국민발안에서 제외할 것인지는 논쟁이 필요하다. 재정 사안을 전면 금지하면 중요한 정책 대부분이 발안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 반대로 제한 없이 허용하면 지출 확대와 세금 감면이 동시에 쏟아질 수 있다. 재정 추계서와 재원 조달안을 의무적으로 첨부하는 절충안이 필요하다.
스위스는 발안과 의회 심사를 결합했다
스위스의 연방 국민발안은 직접민주주의의 대표적 사례다. 투표권자 10만 명이 18개월 안에 서명하면 연방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가결되려면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와 주를 기준으로 한 과반수를 함께 충족해야 한다.
스위스 연방 차원의 국민발안은 일반 법률이 아니라 헌법 개정을 대상으로 한다. 의회는 발안 내용을 검토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발안위원회가 의회의 대안을 받아들이면 원안을 철회할 수도 있다. 스위스 연방정부의 국민발안 안내에 따르면 1891년 제도 도입 이후 투표에 부쳐진 발안 가운데 가결된 비율은 약 10%다.
가결 비율이 낮다고 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국민발안이 시작되면 정부와 의회는 제기된 문제에 공식 입장을 내야 한다. 발안안이 부결되더라도 의회가 일부 요구를 반영한 법률을 마련할 수 있다. 투표 결과보다 의제를 공론장에 올리는 과정이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대만은 법률과 입법 원칙, 주요 정책을 국민투표 대상으로 인정한다. 국민투표안을 처음 제안할 때는 직전 대통령선거 유권자의 1만분의 1 이상이 참여해야 한다. 이후 유권자 1.5% 이상의 연서가 확보되면 국민투표 절차가 진행된다.
대만의 국민투표안은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고 전체 유권자의 4분의 1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된다. 입법 원칙이 가결되면 행정부는 3개월 안에 법률안을 작성해 입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다만 예산과 조세, 급여, 인사에 관한 사항은 국민투표 대상에서 제외한다. 해당 기준은 대만 국민투표법에 규정돼 있다.
두 나라의 사례는 직접민주주의가 즉흥적인 온라인 투표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명 수집과 검증, 정부·의회 심사, 찬반 토론, 정해진 투표일을 거쳐야 한다. 직접민주주의일수록 절차는 더 엄격하고 판단에 필요한 정보는 더 많이 제공돼야 한다.
한국형 국민발안은 단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한국에 국민발안제를 도입하려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현행 헌법이 입법권의 귀속과 법률안 제출권자를 국회, 국회의원, 정부 중심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독자적인 법률안 제출권이나 국민투표 발동권을 부여하려면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타당하다.
처음부터 국민투표로 법률을 확정하는 강한 모델을 도입할 필요는 없다. 일정 수 이상의 국민이 법률안을 발안하면 국회가 정해진 기간 안에 공개 심사하도록 하는 방식부터 시작할 수 있다. 국회가 부결하면 표결 결과와 의원별 찬반, 부결 사유를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국회가 처리 기한을 넘기거나 발안 취지를 훼손하면 다음 단계로 국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발안과 동시에 투표로 직행하는 방식보다 국회의 법률 검토와 시민의 최종 결정을 결합하기 쉽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 사이의 충돌도 줄일 수 있다.
서명 요건은 전국 단위로 설계해야 한다. 전체 유권자의 일정 비율을 충족하는 것과 함께 여러 시·도에서 최소 서명을 확보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인구가 많은 지역이나 특정 정치 성향의 지역만으로 국가 법률이 결정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동일한 주제는 하나의 발안안에만 담도록 해야 한다. 서로 관련 없는 인기 정책을 하나로 묶어 지지를 끌어내는 방식은 허용하지 않는 편이 타당하다. 법안의 제목과 투표 문항은 독립기관이 중립성과 명확성을 심사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도 필요하다. 발안 내용이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헌법상 권력분립에 어긋나는지, 서로 다른 주제를 결합했는지를 투표 전에 판단해야 한다. 투표가 끝난 뒤 위헌 결정으로 효력이 사라지면 사회적 갈등과 비용이 더 커진다.
재정이 필요한 법안에는 비용추계서와 재원 조달안을 의무화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예산정책처가 각각 추계하고 차이가 발생하면 두 결과를 모두 공개할 수 있다. 유권자가 혜택뿐 아니라 세금과 국가채무, 다른 사업의 축소 가능성까지 확인하도록 해야 한다.
온라인 서명과 전자투표는 구분해야 한다
국민발안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면 참여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휴대전화나 공동인증 수단으로 서명할 수 있다면 지역과 연령에 따른 접근성 격차가 완화된다. 서명 현황과 심사 과정을 공개하면 절차의 투명성도 높아진다.
그러나 온라인 서명과 국가 단위 전자투표는 다른 문제다. 서명은 투표 실시를 요구하는 절차이며 잘못이 발견되면 재검증할 수 있다. 비밀투표는 누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어야 하는 동시에 개표 결과의 정확성은 입증돼야 한다.
해킹과 명의 도용, 강요에 의한 투표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실시하는 전자투표는 다른 사람이 선택을 지켜보거나 대신 투표하는 상황을 차단하기 어렵다. 국민투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관리하는 비밀투표를 기본으로 하고, 전자 방식은 안전성과 검증 가능성이 확보된 뒤 제한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알고리즘과 온라인 정치광고에 대한 규제도 필요하다. 누가 얼마를 들여 어떤 집단에 광고를 노출했는지 공개해야 한다. 외국 정부와 해외 단체의 자금 제공을 차단하고, 발안 단체의 모금과 지출 내역도 선거 수준으로 관리해야 한다.
숙의가 빠진 국민투표는 여론조사에 머문다
국민발안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서명과 투표 사이에 숙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정부와 국회, 발안 단체, 반대 측이 같은 기준으로 법안의 효과와 비용을 설명해야 한다. 찬반 의견과 사실 검증 결과를 담은 공보물을 모든 유권자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참여단이 법안을 검토하는 방식도 활용할 수 있다. 시민참여단은 전문가와 이해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쟁점을 정리한다. 찬성과 반대 중 하나를 강요하기보다 유권자가 판단해야 할 핵심 질문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국회는 발안안의 원문만 놓고 찬반을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발안 취지를 유지하면서 위헌 소지와 행정상 문제를 보완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국민투표에서는 원안과 국회 대안, 현행 제도 유지안을 비교해 선택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국민투표일을 정례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서명이 성립할 때마다 투표를 실시하면 비용이 커지고 정치가 상시 투표운동에 빠질 수 있다. 연 1회나 2회 정해진 날에 안건을 모아 투표하면 행정 비용을 줄이고 충분한 토론 기간을 확보할 수 있다.
다만 한 번에 너무 많은 안건을 투표하면 유권자의 판단 부담이 커진다. 안건 수를 제한하고 법안별 핵심 내용과 재정 효과를 표준화해 제공해야 한다. 투표용지에 담긴 짧은 문장만 보고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세상은 달라지지만 정치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국민이 직접 법안을 제안하고 투표할 수 있게 되면 정치권의 의제 독점은 약해질 수 있다. 국회가 외면한 문제를 시민이 공론장에 올리고, 정당은 국민발안에 대응해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선거 사이의 긴 정치적 공백도 줄어들 수 있다.
반면 사회 갈등이 투표를 통해 빠르게 정치화될 가능성도 커진다. 조직과 자금이 많은 집단이 발안 절차를 반복적으로 활용하면 시민 참여의 외형 아래 새로운 권력 불균형이 생길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가 국회 불신을 이용한 정치산업으로 변질될 위험도 경계해야 한다.
국민이 결정했다는 말이 정책 책임을 없애서도 안 된다. 정부는 가결된 법률을 집행할 방법을 마련해야 하고, 국회는 다른 법률과의 충돌을 정리해야 한다. 발안 단체도 법안의 비용과 부작용에 대해 설명할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발안제의 목적은 국회를 우회하는 데 있지 않다. 국회가 국민의 요구를 더 빨리 듣고, 공개적으로 심사하며, 처리 결과를 설명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대표자를 필요 없게 만드는 제도가 아니라 대표자가 국민에게 응답하도록 압박하는 제도다.
세상은 제도 하나로 바뀌지 않는다. 다만 시민이 정책의 관객에서 제안자로 이동하면 정치가 다루는 문제와 결정 과정은 달라질 수 있다. 높은 서명 기준과 기본권 심사, 재정 검증, 숙의 절차를 갖춘 국민발안제라면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국민의 선택을 존중하는 일과 그 선택이 충분한 정보 위에서 이뤄지게 하는 일은 함께 추진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