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지운 북한 헌법…김정은의 ‘두 국가’ 노선, 법제화 단계로

북한이 헌법에서 조국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하고, 북측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토 조항을 새로 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23년 말부터 제시해 온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이 정치 구호를 넘어 헌법 체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동시에 국무위원장을 국가수반으로 규정하고 핵무력 지휘권을 명시하면서 김 위원장의 권한도 한층 강화됐다.
통일부가 6일 공개한 북한 새 헌법 전문에 따르면 기존 헌법 서문과 본문에서 ‘북반부’, ‘조국통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등 한반도를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전제하던 표현들이 빠졌다. 기존 사회주의헌법 제9조에 있던 조국통일 실현 관련 내용도 삭제됐고, 선대 지도자의 업적으로 기술됐던 통일 위업 표현도 정리됐다. 이는 북한이 더 이상 남북관계를 ‘분단된 하나의 민족’ 관계가 아니라 별개의 국가 관계로 재정의하려는 흐름을 반영한 변화로 풀이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영토 조항 신설이다. 새 헌법 제2조는 북한의 영역이 북쪽으로 중국과 러시아,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는 영토와 그에 기초해 설정된 영해·영공을 포함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남쪽의 육상·해상 경계선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다. 이 대목은 향후 서해 북방한계선, 군사분계선, 해상 경계 문제를 둘러싼 해석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개헌은 김 위원장이 2023년 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이후 이어진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가 동족 관계가 아니라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굳어졌다고 주장했고, 2024년 1월에는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으로 교육하도록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고 밝혔다. AP도 당시 김 위원장이 북한 헌법에서 통일과 화해 개념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실제 공개된 새 헌법에는 김 위원장의 앞선 예고와 달리 한국을 ‘제1의 적대국’ 또는 ‘불변의 주적’으로 명시하는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기존 헌법에 있던 ‘제국주의 침략자들’, ‘내외 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 같은 전투적 표현도 일부 정리됐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대외적으로는 ‘정상국가’ 이미지를 강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남북관계를 별개 국가 관계로 고착화하려 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의 권한 강화도 이번 개헌의 또 다른 축이다. 새 헌법은 국무위원장을 국가수반으로 정의하고, 국가기관 배열에서도 국무위원장을 앞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국무위원장의 독점적 핵무력 지휘권과 위임 근거도 처음으로 명시됐다. 최고인민회의의 국무위원장 소환권이 사라지고, 국무위원장의 주요 간부 임면 권한이 확대된 점까지 고려하면, 북한의 권력 구조가 김 위원장 1인 중심으로 더 명확히 재편된 셈이다.
헌법 서문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가 삭제되고 김 위원장의 통치 이념인 ‘인민대중제일주의’가 들어간 점도 상징적이다. 이는 선대 지도자의 혁명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김정은 시대의 독자적 통치 노선을 헌법에 새기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무상치료, 세금 없는 나라, 실업을 모르는 사회 등 현실과 괴리된 사회주의 복지 조항이 삭제된 것도 눈에 띈다. 북한이 이념적 선언보다 현재 체제 운영에 맞는 표현으로 헌법을 조정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새 헌법에는 ‘해외군사작전 참전열사’가 사회의 특별한 보호 대상으로 추가됐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북한이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강화해 온 흐름과 맞물려 해석된다. 북한이 해외 군사작전에 투입된 인원과 전사자 예우를 헌법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다면, 이는 북한의 군사 활동 범위가 한반도 내부를 넘어 대외 전선까지 확장됐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다만 구체적 적용 대상과 규모는 북한이 공개하지 않은 만큼 단정은 어렵다.
이번 개헌은 한국의 헌법 질서와도 충돌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이 별도 영토 조항을 통해 남쪽에 대한민국이 접한다고 명시한 것은, 남북이 한반도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법적으로 인식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드러낸다. 한국 정부가 평화공존과 대화 기조를 내세우더라도, 헌법상 통일 지향과 북한의 ‘두 국가’ 법제화 사이에는 법적·정치적 긴장이 남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