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직장 환경은 OECD 평균보다 긴 노동시간과 치열한 경쟁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아파도 쉬지 못하는 직장인이 여전히 절반에 가깝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시민건강연구소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모임 등의 공동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약 4명(38.4%)은 유급병가가 보장되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병가가 없는 환경에서는 감기, 근골격계 질환, 정신적 스트레스 같은 일반적인 질환은 물론, 장기 치료가 필요한 중증질환까지도 제대로 된 회복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이로 인해 상태가 악화돼 재입원이 반복되거나 만성질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픈데도 출근’이 일상이 된 대한민국
“이러다가는 직원이 쓰러질 때까지 돌려쓰는 노동 시스템이 고착화될 것입니다.”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실제로 조사에 응답한 이들 중 약 절반(50.7%)은 아파도 결근하지 않고 출근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직장인은 단순히 노동력으로만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건강과 존엄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직장 내 유급병가가 시스템으로 정착돼 있지 않을 경우, 조직문화마저 병가 사용을 꺼리게 만드는 방향으로 고착화된다.
이러한 현실은 유급병가가 법적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인 민간기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급병가가 법으로 의무화된 곳은 공무원, 교사 등 극히 일부다. 반면, 민간 부문 종사자는 사업주 의지에 따라 병가 여부가 결정된다.
▶OECD 평균에도 못 미쳐…선진국과의 격차 뚜렷
캐나다, 독일, 영국 등 유럽 권역 대부분은 ‘유급병가제’를 법제화해 실질 임금 손실 없이 병가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최대 28주까지 정부가 부당해고 보호와 생계지원을 포함한 ‘법정 병가’를 보장한다.
반면 한국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자가격리 병가 지원금’이 일시적으로 운영되었을 뿐, 항구적인 제도로 정착되지 못했다.
▶영세 사업장·비정규직서 병가 보장 “그림의 떡”
유급병가 제도가 가장 취약한 층은 비정규직과 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다.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를 포함한 특수고용직 역시 법적 보호 대상이 아니며, 병가 신청은커녕 ‘아프면 일거리 끊긴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근무 중이다.
건강권이는 시민단체 행동모임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 활동가는 “실제로 병원을 찾는 것 자체가 사치인 이들도 많다”면서 “장시간 노동, 낮은 임금, 복지 미비가 겹친 구조 안에서는 건강보다 생계가 우선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공병가 제도화’ 논의 필요…정부와 국회, 안일한 대응
전문가들은 유급병가를 의료보험이나 고용보험과 연동한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병가제도 실험’이 진행 중이다. 서울시는 일부 구직자 대상의 표준근로계약서에 병가 조항을 넣는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경기도 역시 도 차원의 ‘공공병가’ 제도 도입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예산 문제, 사업주 반발 등을 이유로 본격적인 논의조차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현재 국회에서는 관련 입법안이 일부 발의되었으나, 실질 심의나 정책 반영은 요원한 상태다.
▶기자의 시각 – “병가 제도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미래복지”
한국은 ‘인구 고령화 속도 1위 국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젊은 노동력의 수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건강한 노동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
오랜 의학 지식과 현장 취재 경험에 비춰봤을 때, 유급병가는 치료와 예방, 건강 불평등 해소의 측면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병가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기진단과 조기치료가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의료비 증가와 생산성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다.
정부는 유급병가 확대가 재정 부담이라고 말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큰 사회적 비용은 과로사와 반복되는 병가 결근, 나아가 극단적 선택이다. 노동 존엄을 ‘죽음’으로 증명해야 했던 여러 사건 이후에도 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자격이 없다.
▶끝으로 – ‘아프면 쉬는 건 권리입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사회’는 구성원 전체의 건강을 위협한다. 이제는 유급병가를 단순한 복지 혜택이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기본 건강권으로 재정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