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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진핑의 ‘기억전쟁’, 역사 재해석이 불러올 지정학적 균열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톈안먼 망루에 섰고, 이는 세계에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중국이 과거 전쟁의 기억을 새롭게 해석하며, 미국 중심 질서에 도전하는 ‘기억전쟁’의 선두에 서겠다는 것이다.

시진핑이 강조하는 역사관은 단순한 애국주의 수사가 아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이 서구가 아니라 중국과 소련이었다는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전통적인 국제질서, 특히 미국이 주도해온 전후 체제의 정당성을 흔드는 시도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와 교과서가 이를 뒷받침하며 ‘공산당이 항일전쟁의 중심’이었다는 새로운 서술을 제도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정가에서는 이를 단순한 역사논쟁이 아닌 지정학적 무기화로 해석한다. 워싱턴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시 주석의 역사 재구성이 대만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중국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을 앞세워 ‘대만 반환은 이미 국제적으로 합의된 사실’이라 주장하고, 이는 미국이 그간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을 정면으로 위협한다. 미국 의회 내 초당적 인사들은 이러한 역사 해석이 사실상 ‘현대판 정당성 논리’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보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대만과의 군사·경제 협력 강화를 주장한다.

시진핑의 태도는 소련 붕괴에 대한 공포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당의 무력화가 소련을 무너뜨렸다고 분석하며, 중국 사회에서 ‘역사 허무주의’를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 당의 권위를 흔드는 어떤 논의도 차단하면서,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역사’에서 끌어내는 방식이다. 이는 미국 정치권에서 ‘21세기형 전체주의의 교과서’라는 날선 평가를 불러왔다.

문제는 시진핑의 ‘기억전쟁’이 국내 선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를 향해 “중국이야말로 제국주의를 물리친 정의의 세력”이라는 메시지를 확산하고 있다. 이는 서방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역에서 미국의 외교적 기반을 잠식하는 효과를 낳는다. 실제로 아프리카, 중남미 일부 국가는 중국의 서술에 호응하며 ‘포스트 서구 질서’ 담론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역사가 외교 전략의 연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그동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보편성을 전후 세계질서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시진핑은 “동쪽은 떠오르고, 서쪽은 쇠퇴한다”는 논리로 이를 대체하려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다시 쓰는 작업이 아니라, 미래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포석이다.

중국의 ‘기억전쟁’은 앞으로 미중 간 갈등의 새로운 전선이 될 것이다. 경제·안보뿐 아니라 역사와 해석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이 가속화될수록, 세계는 더 깊은 분열을 겪게 된다. 결국 질문은 단순하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시진핑의 구호에 세계가 얼마나 동의할 것인가. 그리고 미국은 이에 맞서 어떤 ‘기억의 언어’를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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