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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디지털 법률

사이버 렉카 시대,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사이의 경계…‘설리법’이 막지 못한 명예훼손의 변종들

2019년 10월 14일, 가수 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 이상의 사회적 충격이었다. 수많은 대중이 ‘악플’이라는 말의 잔혹함을 처음으로 실감한 날이었다. 사건 이후 정치권은 ‘설리법’ 혹은 ‘최진리법’이라 불리는 법안을 잇달아 발의했다. 온라인 게시물 작성 시 실명 확인을 강화하고, 댓글 작성자 정보 공개를 확대하며, 명예훼손성 표현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 공간은 여전히 ‘사이버 렉카’라는 이름으로 변종된 악플 문화를 재생산하고 있다.

■ 악플에서 사이버 렉카로 — 형태만 달라진 폭력

설리의 죽음 이후 포털 댓글창은 잠시 닫혔지만, 디지털 사회는 더 교묘하게 폭력을 진화시켰다. 과거의 ‘악플러’는 익명성 뒤에서 개인을 공격했다면, 오늘날의 ‘사이버 렉카’는 ‘정보 전달’이나 ‘팩트 확인’을 명분으로 인격을 훼손한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등 플랫폼은 자극적 이슈를 중심으로 ‘조회수의 경제’를 형성했고, 일부 콘텐츠 제작자는 ‘누가 잘못했는가’를 가르며 누군가의 사생활과 평판을 해체하는 영상을 만들어 돈을 번다.

명예훼손의 법적 정의는 여전히 간단하다. 형법 제307조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허위 사실일 경우 형량은 더 무거워진다. 그러나 문제는 ‘공연성’과 ‘사실 적시’의 경계가 인터넷에서 무의미해졌다는 데 있다.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유튜브·커뮤니티에서는 단 한 번의 게시물, 단 한 컷의 영상이 ‘공연히’의 요건을 자동으로 충족한다.

■ 법이 따라가지 못한 이유 —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의 충돌

설리법은 국회에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끝내 통과되지 못했다. 헌법 제2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특히 실명제 강화나 댓글 제한 조치는 과거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단을 받은 전력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사회의 기본 토대이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인격을 짓밟을 권리는 아니다.

법원도 이 균형점을 찾기 위해 고심해왔다. 대법원은 2018년 판례에서 “공익 목적이 인정되는 한 사실 적시 명예훼손이라도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사이버 렉카의 콘텐츠는 공익과 무관한 ‘사적 이익 추구’에 가깝다. 특정 연예인의 연애사, 개인의 SNS 발언, 또는 사회적 논란의 당사자 발언을 편집·왜곡해 조회수를 얻는 행위는 ‘언론 행위’가 아니라 ‘사익적 폭로’에 해당한다.

■ 사이버 명예훼손의 현주소 — 형사처벌의 실효성

현행법상 사이버 명예훼손은 「정보통신망법」 제70조에 의해 처벌된다.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히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사실이나 허위사실을 적시한 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수사기관이 ‘비방의 목적’을 입증하기 어렵고,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만 수사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튜브나 SNS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은 서버가 해외에 있어 게시물 삭제나 신원 확인이 지연된다. 결국 피해자는 법적 구제 절차를 밟는 동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피해를 입는다. 댓글 한 줄, 영상 한 컷이 평생의 낙인이 되는 셈이다.

■ 제도의 공백을 메우려면 — 기술보다 윤리의 복원

법은 기술보다 항상 느리다. AI 추천 알고리즘은 자극적 콘텐츠를 상위에 노출하고, 이용자의 분노를 상업화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개인의 명예는 ‘클릭당 수익’의 부속품이 된다. 따라서 명예훼손 문제는 단순히 형사처벌 강화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첫째, 플랫폼 책임성 강화가 필요하다. 유튜브나 포털 등은 단순 중개자가 아니라 ‘콘텐츠 유통 사업자’로서 명예훼손 게시물의 삭제·차단 의무를 실질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둘째, 정책적 대응으로는 ‘악성 댓글 자동 탐지’ 같은 기술적 장치보다 ‘디지털 시민 윤리 교육’의 제도화가 시급하다. 초·중등 교육 단계에서부터 사이버 폭력의 법적 결과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셋째, 법적 기준의 현실화가 필요하다. 단순한 의견 표현과 명예훼손의 경계를 정교하게 재설정하고, 반복적·조직적 비방행위에 대해서는 가중처벌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 맺으며 — 죽음이 남긴 숙제

설리의 죽음은 사회에 ‘악플’의 실체를 일깨웠지만, 그 이후의 제도적 변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이버 렉카는 새로운 포장을 두른 악플의 진화형이며, 플랫폼은 여전히 그 폭력을 수익 모델로 삼고 있다.

법률의 임무는 단지 처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표현의 자유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그 자유를 행사하는 개인이 타인의 인격을 존중할 때 비로소 사회적 합의가 완성된다. ‘설리법’이 실현되지 못한 오늘,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말할 자유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가 인간다운 말인가”일 것이다.

[사진:진리에게 2013.11.23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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